[국정원 논술 논제 분석] ⑨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본 외국문물의 도입방안에 대해 논하시오
박지원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청(淸)나라를 방문해 ‘열하일기’를 저술한 선비이다. 정조 4년인 1780년 청의 건륭제 칠순 잔치에 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직접 눈으로 본 문물을 기록했다. 1778년 박제가가 청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저술한 북학의(北學議)와 같은 기행문의 일종이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대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했던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청의 무력에 무릎을 꿇었지만 만주족을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황량한 만주에서 거병한 만주족은 중원을 지배하던 명(明)을 멸망시킨 이후 서양과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중국 역사 이래 가장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본 외국문물의 도입방안에 대해 논하라’는 논제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물자와 영토의 규모보다는 지배층의 정신에 따라 강대국 여부 결정돼
이 논제분석을 준비하면서 필자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배운 역사지식을 동원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소한 열하일기를 다시 한번 정독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소장하고 있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수십 년간 해외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소소한 감정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국정원 수험생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열하일기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은 수레의 종류가 다양해서 물자의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수레 바퀴도 표준화되어서 전국에서 사용하는 크기가 동일해 어디에서 고장이 나도 교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사람이 타는 태평차, 짐을 싣는 대차, 사람이 끄는 독륜차, 융차, 역차, 수차, 포차 등 활용도에 따라 다르게 제작했다.
수레는 육지를 다니는 배와 같이 이동수단으로 유용하며 국가의 부(富)는 수레의 숫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수레가 없어서 물건의 유통도 어렵고, 전쟁이 나도 군수물자의 운송이 어려웠다. 대게 화물은 사람이 지게로 등짐을 지고 다녀 효율성은 전혀 없다. 청은 재화도 풍부하지만 재화가 골고루 유통되고 있었는데 수레가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었다.
둘째, 청은 조선보다 더 추운 국가이지만 주택구조와 난방방식이 잘 정비돼 있어서 생활하는 데는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개방적인 조선의 주택과 달리 청의 주택은 작은 성채처럼 지어져 외부의 침입을 막고 가족들이 모두 쉽게 소통할 수 있었다. 대가족이 각기 다른 건물에서 거주하지만 공동으로 사용하는 마당에 나오면 만날 수 있다.
조선은 난방을 위해 온돌을 개발했지만 설치하기 쉽지 않고 난방을 위해 나무를 많이 태워야 하기 때문에 주변 산의 나무가 남아나지 않는다. 불을 때지 않는 여름철에는 고양이나 쥐가 온돌 통로를 다니며 훼손하고, 혹은 죽어서 연기가 지나가는 통로는 막는다. 기와집의 지붕도 흙을 많이 사용해 무겁고 천장은 낮은 편이다. 벽체도 나무와 풀을 이어서 뼈대를 만들고 진흙을 바르기 때문에 습기에 약하고 외부 충격에 쉽게 무너진다.
셋째, 청은 주택이나 성곽의 축조에 벽돌을 많이 사용해 가마도 많이 발달돼 있었다. 가마의 구조는 평지에 설치하고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옥수수대를 사용해도 열의 효율이 높기 때문에 튼튼하게 구울 수 있다. 대규모로 가마를 짓기 보다는 벽돌이 필요한 지역에서 소규모로 가마를 간편하게 만든 후 벽돌을 구워 운송의 불편함도 해소했다.
반면에 조선의 가마는 산비탈에 비스듬히 설치해 열이 골고루 분산되지 않아 전체가 골고루 구워지지 않는다. 열의 효율이 떨어져 많은 나무를 때야 겨우 벽돌을 구울 수 있다. 가마를 운영하는데 너무 많은 나무가 필요해 가마는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완성된 벽돌을 옮기는 수고도 많이 든다. 땔감이 다 사라지면 나무가 많은 더 깊은 산속으로 가마를 옮겨야 한다. 무분별한 벌채로 인해 산은 헐벗어 홍수의 원인이 된다.
결론적으로 청이 강대국이 된 것은 대륙이라는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물자가 기반이 됐지만 다양한 수레와 도로망, 주택구조의 편의성, 가마의 발달 등이 기여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청도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는 말을 타고 이동하며 천막에 살았지만 대륙을 정벌한 이후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궁핍한 조선에서 평생을 산 박지원의 눈에는 새로운 제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현실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 청이 부강해진 비결로 비쳐진 것이다.
◈ 동도서기와 같은 편협한 사고를 벗어나 국민이 혁신 선도해야
▲ 논제 분석과 개요문 샘플 [출처=iNIS]
국정원 수험생에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본 외국문물의 도입방안에 대해 논하라’는 논제에 대한 논술을 작성하라고 하는 이유는 열하일기로부터 외국문물의 장∙단점을 비교해 도입할 수 있는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열하일기를 읽고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가 총합적인 이익 측면에서 외국의 실용적인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조선의 양반들은 구태의연한 격식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해 앞선 의술, 교통제도, 과학기술을 도입했어야 했다. 천연두와 같은 질병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의술의 연구는 16세기 발간된 허준의 동의보감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미 서양의 의술을 도입한 중국에서는 전염병을 극복하고 있었다.
교통제도를 보면 조선에서는 삼국시대에 정착된 후진적인 역참제도와 봉수대가 최신 통신수단으로 활용됐다. 삼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은 조운선이 해로를 통해 운송했고, 육지의 도로는 협소해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렀다. 세종이 측우기, 혼천의 등을 개발해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했지만 후세들에 의해 명맥이 끊어졌다. 양반들은 실용적인 기기를 개발하기 보다는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세월을 보내는데 익숙했다.
둘째, 국민들의 실생활에서 촉발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해외의 기기의 도입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수레와 교량도 물자의 이동에는 필수적인 도구였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은 경제활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수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도로망이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대륙의 기마민족들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라는 목적에서 도로망을 정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백성들의 불편은 지대했다.
조선은 도로를 정비할 기술력도 부족했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수 있는 재정 여력도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동네 하천에 불과한 한양의 청계천 정도에 작은 다리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으로 대규모 교량이나 터널을 뚫을 수는 없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상업이 발달해 백성들이 부유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백성들을 지배할 통제력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셋째, 외부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양반과 관리들이 솔선수범해 적극적으로 도입했어야 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각종 사절단으로 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러워만 했지 받아들이려는 의지는 없었다. 일본에 갔던 통신사들도 조선의 유학을 전하는 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서양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이미 조선보다 앞섰던 일본의 문명은 애써 외면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에 굴욕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나라가 망하도록 방치한 것이다.
성리학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아들인 조선의 양반들은 진정한 지도자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양반정신도 서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선의 지배층은 입으로만 떠들었지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국난이 발생해도 임금과 양반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이 땅을 지킨 사람들은 힘 없고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사회적 운동으로 승화시킨 것도 민초였다. 조선이 망하는 데 지배층의 무능과 부도덕이 큰 몫을 담당했다.
결론적으로 어떤 국가든 자국의 문물의 진흥뿐만 아니라 외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주체적인 문명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화두로 부상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 사상도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편협한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문명의 충돌과 문화융합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국가만 존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글로벌화된 지구촌에서 정치지도자와 공무원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먼저 혁신을 선도해야 나라가 바뀐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해외 연수를 다녀온 공무원들의 보고서가 남의 보고서를 그대로 베끼거나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언론보도를 보면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의 관리들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 가눌 길 없다.
- 계속 –
* 내용 문의 : 민진규 교수(stmin@hotmail.com)
사대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했던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청의 무력에 무릎을 꿇었지만 만주족을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황량한 만주에서 거병한 만주족은 중원을 지배하던 명(明)을 멸망시킨 이후 서양과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중국 역사 이래 가장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본 외국문물의 도입방안에 대해 논하라’는 논제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물자와 영토의 규모보다는 지배층의 정신에 따라 강대국 여부 결정돼
이 논제분석을 준비하면서 필자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배운 역사지식을 동원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소한 열하일기를 다시 한번 정독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소장하고 있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수십 년간 해외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소소한 감정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국정원 수험생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열하일기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은 수레의 종류가 다양해서 물자의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수레 바퀴도 표준화되어서 전국에서 사용하는 크기가 동일해 어디에서 고장이 나도 교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사람이 타는 태평차, 짐을 싣는 대차, 사람이 끄는 독륜차, 융차, 역차, 수차, 포차 등 활용도에 따라 다르게 제작했다.
수레는 육지를 다니는 배와 같이 이동수단으로 유용하며 국가의 부(富)는 수레의 숫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수레가 없어서 물건의 유통도 어렵고, 전쟁이 나도 군수물자의 운송이 어려웠다. 대게 화물은 사람이 지게로 등짐을 지고 다녀 효율성은 전혀 없다. 청은 재화도 풍부하지만 재화가 골고루 유통되고 있었는데 수레가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었다.
둘째, 청은 조선보다 더 추운 국가이지만 주택구조와 난방방식이 잘 정비돼 있어서 생활하는 데는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개방적인 조선의 주택과 달리 청의 주택은 작은 성채처럼 지어져 외부의 침입을 막고 가족들이 모두 쉽게 소통할 수 있었다. 대가족이 각기 다른 건물에서 거주하지만 공동으로 사용하는 마당에 나오면 만날 수 있다.
조선은 난방을 위해 온돌을 개발했지만 설치하기 쉽지 않고 난방을 위해 나무를 많이 태워야 하기 때문에 주변 산의 나무가 남아나지 않는다. 불을 때지 않는 여름철에는 고양이나 쥐가 온돌 통로를 다니며 훼손하고, 혹은 죽어서 연기가 지나가는 통로는 막는다. 기와집의 지붕도 흙을 많이 사용해 무겁고 천장은 낮은 편이다. 벽체도 나무와 풀을 이어서 뼈대를 만들고 진흙을 바르기 때문에 습기에 약하고 외부 충격에 쉽게 무너진다.
셋째, 청은 주택이나 성곽의 축조에 벽돌을 많이 사용해 가마도 많이 발달돼 있었다. 가마의 구조는 평지에 설치하고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옥수수대를 사용해도 열의 효율이 높기 때문에 튼튼하게 구울 수 있다. 대규모로 가마를 짓기 보다는 벽돌이 필요한 지역에서 소규모로 가마를 간편하게 만든 후 벽돌을 구워 운송의 불편함도 해소했다.
반면에 조선의 가마는 산비탈에 비스듬히 설치해 열이 골고루 분산되지 않아 전체가 골고루 구워지지 않는다. 열의 효율이 떨어져 많은 나무를 때야 겨우 벽돌을 구울 수 있다. 가마를 운영하는데 너무 많은 나무가 필요해 가마는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완성된 벽돌을 옮기는 수고도 많이 든다. 땔감이 다 사라지면 나무가 많은 더 깊은 산속으로 가마를 옮겨야 한다. 무분별한 벌채로 인해 산은 헐벗어 홍수의 원인이 된다.
결론적으로 청이 강대국이 된 것은 대륙이라는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물자가 기반이 됐지만 다양한 수레와 도로망, 주택구조의 편의성, 가마의 발달 등이 기여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청도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는 말을 타고 이동하며 천막에 살았지만 대륙을 정벌한 이후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궁핍한 조선에서 평생을 산 박지원의 눈에는 새로운 제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현실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 청이 부강해진 비결로 비쳐진 것이다.
◈ 동도서기와 같은 편협한 사고를 벗어나 국민이 혁신 선도해야
▲ 논제 분석과 개요문 샘플 [출처=iNIS]
국정원 수험생에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본 외국문물의 도입방안에 대해 논하라’는 논제에 대한 논술을 작성하라고 하는 이유는 열하일기로부터 외국문물의 장∙단점을 비교해 도입할 수 있는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열하일기를 읽고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가 총합적인 이익 측면에서 외국의 실용적인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조선의 양반들은 구태의연한 격식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해 앞선 의술, 교통제도, 과학기술을 도입했어야 했다. 천연두와 같은 질병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의술의 연구는 16세기 발간된 허준의 동의보감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미 서양의 의술을 도입한 중국에서는 전염병을 극복하고 있었다.
교통제도를 보면 조선에서는 삼국시대에 정착된 후진적인 역참제도와 봉수대가 최신 통신수단으로 활용됐다. 삼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은 조운선이 해로를 통해 운송했고, 육지의 도로는 협소해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렀다. 세종이 측우기, 혼천의 등을 개발해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했지만 후세들에 의해 명맥이 끊어졌다. 양반들은 실용적인 기기를 개발하기 보다는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세월을 보내는데 익숙했다.
둘째, 국민들의 실생활에서 촉발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해외의 기기의 도입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수레와 교량도 물자의 이동에는 필수적인 도구였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은 경제활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수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도로망이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대륙의 기마민족들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라는 목적에서 도로망을 정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백성들의 불편은 지대했다.
조선은 도로를 정비할 기술력도 부족했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수 있는 재정 여력도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동네 하천에 불과한 한양의 청계천 정도에 작은 다리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으로 대규모 교량이나 터널을 뚫을 수는 없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상업이 발달해 백성들이 부유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백성들을 지배할 통제력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셋째, 외부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양반과 관리들이 솔선수범해 적극적으로 도입했어야 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각종 사절단으로 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러워만 했지 받아들이려는 의지는 없었다. 일본에 갔던 통신사들도 조선의 유학을 전하는 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서양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이미 조선보다 앞섰던 일본의 문명은 애써 외면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에 굴욕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나라가 망하도록 방치한 것이다.
성리학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아들인 조선의 양반들은 진정한 지도자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양반정신도 서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선의 지배층은 입으로만 떠들었지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국난이 발생해도 임금과 양반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이 땅을 지킨 사람들은 힘 없고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사회적 운동으로 승화시킨 것도 민초였다. 조선이 망하는 데 지배층의 무능과 부도덕이 큰 몫을 담당했다.
결론적으로 어떤 국가든 자국의 문물의 진흥뿐만 아니라 외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주체적인 문명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화두로 부상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 사상도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편협한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문명의 충돌과 문화융합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국가만 존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글로벌화된 지구촌에서 정치지도자와 공무원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먼저 혁신을 선도해야 나라가 바뀐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해외 연수를 다녀온 공무원들의 보고서가 남의 보고서를 그대로 베끼거나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언론보도를 보면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의 관리들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 가눌 길 없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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