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공산권자료로 본 625전쟁 재평가(3)
국가정보전략연구소
2011-04-16 오후 5:45:00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일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3):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3. 스탈린, 한국전쟁에의 중국 참전 유도

스탈린이 1950년 1월 30일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배경에는 스탈린 자신이 설명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우려한 바와 같은 1949년 기간 중에 있은 국제환경 변화가 있었다. 소련이 미국과 함께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고 중국공산혁명의 성취로 아시아 지역에서 전략적 상황이 공산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미국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음을 선언하자 스탈린은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고 이러한 견해가 이제까지 전통적 견해가 되어왔다.

이러한 견해는 소련의 대중국 관계에 대하여는 내색을 하지 않고 ‘국제환경 변화’만을 언급한 스탈린의 말을 고지식하게 믿고 그의 진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독일 동구·국제문제 연방연구소 하인지그(Dieter Heinzig)부소장이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에서 직접 열람한 1956년 3월 31일자 북경 주재 유딘 대사의 모택동 면담 기록 원본에 의하면, 모택동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2월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북한을 강화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의논이 있었지만 남한정복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협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24)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 전쟁에 대하여 마오쩌둥과 먼저 협의하였다. 1949년부터 12월부터 1950년 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후반기에 북한의 남한 공격의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토의를 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25)소련비밀문서 공개 시 중요한 역할을 한 볼코고노프(D.Volkogonov) 장군은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1950년 초 여름이 대만과 한반도문제를 완전히 결정짓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주장하였다.(26)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려는 의도를 가진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한반도 전쟁을 개략적으로 합의한 후 김일성에게 중국 동의 조건 부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였으며 한국전 개전 후 중국을 한국전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필사적 노력을 하였다.

1950년 5월 14일자 스탈린의 모택동 앞 전문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김일성이 48번에 걸쳐 남침 승인 간청 전문(27)을 보낸 후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때 스탈린은 “변화된 국제환경” 때문에 군사력에 의한 김일성의 통일을 승인한다고 하면서 “남침에 대한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미루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 것은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구 소련 공산당 국제부의 김일성의 소련방문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해온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소련이 서쪽 방면에서 대처해야 할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직접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은 중국 지도부가 이를 찬성할 때만 개시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으며(28) 5월 14일에는 마오쩌둥에게 이를 확인해 주었다.

스탈린은 한국과 유엔군의 반격 특히 미군기의 공습으로 김일성의 사기가 저하되고 전세가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다시 중공군의 참전을 중국지도부에 촉구하였다. 1950년 7월 5일 스탈린이 중국 주재 로신 대사를 통하여 주우언라이(周恩來)외상에게 보낸 암호전문은 한국전쟁 참전여부를 협의 결정하기 위하여 7월 중순 개최된 중국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 앞서 중국지도부가 중공군의 한·만 국경지대로의 이동문제를 스탈린과 협의한 것을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동 전문에서 적군 (한국군과 UN군)이 38선을 넘게 될 경우 북한군을 돕기 위하여 중공군 9개 사단을 한 만 국경지대에 집결 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면서 이들에 대한 공중엄호를 약속하였다.(29) 7월 13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공군 9개 사단 엄호를 위하여 제트기 1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2-3 개월간 중국 측 조종사 훈련과 훈련 후 장비 이전을 통보하였다.(30)

9월 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후퇴를 거듭함에 따라 절망상태에 빠진 김일성은 9월 28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개최, 적군이 38선을 돌파하게 되면 소련군이 직접 지원해줄 것과 소련군의 직접지원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 국가들로 국제의용군을 조직, 원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스탈린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31) 스탈린은 10월1일 새벽 2시 50분에 9월 29일자 김일성 박헌영 공동 명의 전문을 받고(32) 3시 마오쩌둥과 주우언라이에게 최소한 5~6개 사단의 중국 의용군을 38선 방향으로 진격시켜 북한군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 하였다.(33)

상기 스탈린의 중국 참전 요청 전문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10월 2일자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국은 최초 적군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의용군 4개 사단을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타 지도자들과 세부검토를 한 결과 (1) 중공군의 준비부족, (2) 중공군 참전 시 미 중 전쟁이 될 가능성 및 이 경우 중 소 동맹조약에 의거, 소련군의 참전 불가피, (3) 중공군 참전 시 미국의 중국 내 반동세력 준동 사주 가능성 등의 이유를 내세워 당분간은 의용군을 파견치 않고 인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북한군은 유격전 형태로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34)

이에 대하여 10월 5일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주우언라이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미국은 현 상태에서는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일본은 군사적 잠재력은 있으나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소련을 배후에 둔 중국의용군 참전은 한반도문제를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국이 양보토록 압박하고 한반도가 대륙침략의 도약대가 될 가능성을 사전 방지할 수 있으며 미국으로 하여금 대만을 포기케 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촉구하였다.(35)

스탈린은 이어 10월 8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마오쩌둥이 10월 7일 9개 사단을 조만간 북한에 파견할 예정임을 자신에게 알려왔음을 통보하면서 김일성이 적군과의 전투에서 결연히 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마오쩌둥도 10월 8일 밤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통하여 중공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36)

그러나 10월 9일-10일간 중국의 북한지원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한 주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가 여러 이유를 내세워 마오쩌둥의 참전결정을 번복 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스탈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후카드를 제시하였다. 10월 13일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지원에 대하여 미국이 중국을 공격 보복할 가능성이 없으나 지금 중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북한은 매우 짧은 시일 내에 붕괴될 것이므로 중국은 중국 북동지역에 북한인민군을 재배치하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북한계 소련인과 부상병, 노약자를 이동시켜 북한 재진입을 위한 피난처를 각기 제공하자고 하면서 일단 북한을 포기하는 최종 제의를 중국 측에 하고(37) 10월 13일 쉬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북한군 철수계획을 김일성에게 실제로 제시함으로써(38) 마오쩌둥의 한국전쟁 참전 최종 결심을 유도하였다.(39) 스탈린은 이와 같이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을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북한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제시하여 중공의 한국전 참전을 얻어 내었다.

1950년 11월 미 공군이 미그기를 격추함으로써 알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전쟁 개전 전부터 군사고문을 북한에 파견하고 있던 스탈린은 중공 지상군이 한반도에 진입할 무렵 중공군을 유엔군 전투기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소련 전투기들은 중공 국적표지를, 조종사들은 중공 공군복을 입는 등 중공 전투기로 위장하여 실제로 참전시켰다. 그들은 주로 청천강 이북~압록강 이남지역인 소위 '미그회랑'에서 유엔 전투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방공요격 임무에 치중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 공군의 철저한 위장으로 인해 중공 공군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상당기간 지속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 때까지 소련은 14개 전투비행사단 2만 6000명의 병력을 선양, 안산, 안둥(현재 단둥) 등 중공군 기지에 주둔시켰고, 총 6만 3229회 출격해 1790 여회의 공중전을 벌였으며(40) 모두 335대의 비행기와 12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소련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41)(계속)

<필자 주>

24) Dieter Heizig, “Stalin, Mao, Kim and Korean War Origins, 1950 : A Russian Documentary Discrepancy,” CWIHP Bulletin, Issues8-9(Winter1996/1997), p. 240. 러시아 측이 추후 공개한 동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164-167 참조)에는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25) Chen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p. 85-91 John Merrill은 흐르시쵸프 회고록의 최초 테잎에 기초하여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해 문의하자 마오쩌둥은 동의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Goncharov et al.,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p. 130.

26) Dmitrii Volkogonov, Stalin: Triumf I tragediya(Moskva,1989), tomII. Part 2, p. 108, 신승권, 「소련의 한국에 대한 정책목표분석」(서울 : 집문당, 1966), p. 50에서 인용.

27)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 Translations and Commentary,” CWIHP Bulletin, Issue 3(Fall1993),p.14.

28)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 「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p. 53-54.

29)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1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33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18)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43을 참조.

30)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1 관련 영문 번역 전문(문서 22)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44를 참조.

31) Alexander Y.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 New Evidence from the Russian Archives,” CWIHP Bulletin, Issues6-7,p.98.

3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53~54 영문번역 전문(문서 6)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1-112을 참조.

33)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pp. 98-99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55 영문번역 전문(문서 10)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4를 참조.

34)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p. 100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55 영문번역 전문(문서 12)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114-115를 참조.

35)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p. 101 영문번역 전문(문서 13)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6을 참조.

36)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CWIHP Bulletin, Issues 6-7, p. 102.

37) Ibid., pp. 102-103.

38) Ibid., p. 104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14)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8.

39) Ibid. 중국 측 입장에서 논술한 중공의용군의 한국전 참전 결정 경위에 대한 상세 내용은 Goncharov et al.,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pp. 168-202를 참조.

40) 이근석, “소련 공군 MIG-15 참전,”『조선일보』, 2010. 5. 19, A8면.

41)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Christine Barnard, trans.(Pensylvania: Stackpole Books, 1997), p. 281, 김영호(2006), p. 1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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